Владимир Ли
30 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저널리스트로서 더 높은 인지도를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는 블라디미르 리는 최근까지 비교적 넓지 않은 독자 층과 친구 및 지인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힘과 능력을 발휘하면서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그가 알마티에 본사를 둔 ‘고려신문‘에 정착하여 우즈베키스탄 특파원이 되었고, 그의 이름에 걸맞는 많은 기사와 에세이 및 탐사 기사를 쓰면서 전문적인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동료들은 모두 그를 인정하였지만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는 여전히 스스로 안주하지 않는다.
— 사실 러시아어로 준비된 대부분의 자료가 번역 후 한국어로 언론에 실렸는데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매년 그 수도 점점 더 적어졌다. 애는 타고 걱정은 많은데 명예로운 해결 방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이 슬픈 현실의 이유들을 언급했다.
— 반세기 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한국어를 배웠고, 어떻게 시작했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우리의 증조부들이 극동에서부터 ‘사용해온’ 일상적인 대화체만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필요한 말들을 겨우 구사했지만 쓰기를 배울 곳이 없었다. 교사, 교과서, 사전, 교재 등이 필요했지만 국가가 정치적인 이유로 «관용»을 베풀지 않는데 달리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공화국의 독립으로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의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우즈베키스탄은 1992 년부터 타슈켄트에 대한민국 교육 센터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많은 도시 및 농촌 학교에 한국 학과 또는 한국어 선택 수업이 개설 되어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언어를 익히고 싶다면 게으름을 피우지 마라! 모든 것은 스스로 하기 나름이다.”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면 따라 잡기 어려워진다’라고 요약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깊은 명상, 철학적 성찰을 하는 경향이 있는 그는 어릴 때부터 급하게 만들어진 경구와 소원 성취라 쓴 문장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그렇고, 완전히 별자리의 해석에 따라 수세기에 걸친 지혜로 입증된 바에 따르면, 염소 자리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모든 것을 성취한다고 한다. 그의 신조는 높은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 노력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오직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 인내심, 말과 행동의 균형, 이 모든 것은 그가 가혹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획득된 것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속을 터놓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발설하지 않고 아주 풍부하고 감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깊고 끈기 있게 관찰하고 특별한 기억력도 가졌다. 한때 주변 상황으로 인해 열정을 갖거나 열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떤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니콜라에비치는 이런 힘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보게 되지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저 침묵하며 바라보고만 있지 않는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 자신은 자존심으로 분명히 그러한 도움을 거부할 터이지만, 그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그들 모두에게도 나쁜 습관을 고치는데 도움을 줄 클리닉의 주소를 주고 동시에 치료를 받는데 모든 비용을 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또한 유명한 지도자들이 충고했듯이 성취한 것들에 만족하지 말고 야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럴 때도 무작정 욕심을 부리며 서두르지 않는다. 우선,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지 않으면서 더 큰 목표를 향해 예측 가능한 모든 결과와 부작용까지 신중하게 고려하여 행동하라.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주력하는 주요 문학 작품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강제 이주된 한인,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고, 중앙 아시아의 태양 아래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미래를 꿈꾸는 일, 이 주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마침내 결심했다. 그리고 우선 다음과 같이 진행했다.
“은퇴를 하게 되면 존재의 유한성과 우주의 무한성에 대한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된다. 그 동안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며 살았던 크고 긴 삶은 과거가 되어 남았다. 그러나 때로는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아직 다 하지 못하고, 빚을 모두 갚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안돼, 안돼’하며 내 안에 무언가가 찌르면서 이 세상에서 아직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고 빈 종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심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청난 양의 자료와 정보들을 찾고 검토하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 내고, 줄거리와 구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재미있는 예술 작품으로 재 구성하여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허구를 조금이라도 섞었을 때 독자에게 전달할 사실의 신뢰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작업량의 공책을 훑어 보면서 빛 바랜 사진들과 내 기억을 뒤적이며 이 모든 것이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질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수집된 자료에는 역사적 진실성을 담은 고유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선대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유를 덧붙이는 것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일이다. 전형적인 한인 가족의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면 필요한 것을 정확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미 위대한 작품을 발표한 동료 기자 중 한 사람이 조언했다.
이렇게 소설 «희망의 언덕»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 차 세계 대전 직후 태어난 작가의 동료들은 마치 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이 작품을 읽을 때 어떤 부분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판잣집에서의 일상 생활, 알 수 없는 빈민가로 이사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것 등 화가의 붓으로 그려낸 듯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다.
논에서의 지옥 같은 노동,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낡은 옷을 입고 아무다리야의 추운 겨울에 갈대를 수확하는 장면 … 그리고 심지어 성인 남성도 참을 수 없는 집안일을 하는 사이 사이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년들이 이 모든 일들을 어린 손으로 했다. 나라는 거창하게 사회주의 밝은 미래를 건설하고 있었고, 5 개년 계획을 기획하고 과도하게 추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강력하고 변화하기 힘든 소련의 주변부에는 머리 위에 비를 피할 지붕조차 없는 수천의 가족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 처해 있었다. 어떻게든 봄을 맞이한 그들은 전기도 장비도 기본 편의 시설도 없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한 해 농사를 위해 쌀, 면화 및 기타 농작물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최신식으로 이미 우주를 탐험하고 제국 규모의 궁전, 갤러리, 육교를 만들고 있었지만 우리 민족이 살던 세계의 시간은 반세기 늦게 지나는 듯이 보였고 모든 것이 인간의 노동력에 기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조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현재 누리는 상황을 제대로 평가하고 부모가 제공한 편안한 삶의 수준이 어떻게 해서 달성되었는지 이해하려면 «희망의 언덕»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태어난 1947년의 대가족에게 그 당시의 모든 공포는 부모 사이의 문제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타고난 성향이 강했던 작가의 아버지 이 손은 자신이 선택한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젊은 그는 광산에서 다른 많은 동료들과 달리 아주 빠르게 광산의 기초를 습득해서 단순 벌목공에서 눈에 띄어 바로 십장이 되고 감독이 되었다. 현장의 책임자가 되었고 대학에도 갔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만 당국과 어울리지 못했다. 자존심 강화고 불 같은 성질의 남자였기 때문에 술을 잔뜩 마시고 자신의 모든 생각을 말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어디로 사라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새 거처를 알리며 아내에게 새로운 직장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또 다른 흙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가 투르크메니스탄이든 카라칼팍스탄이든 아무리 멀리 가도 그곳에는 거의 같은 조건 하에 다른 한인 가족들이 모여들어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어떤 곳은 몇몇 가구가 모여 한인촌을 이루었다. 러시아 식으로 니콜라이라고 불리던 이 손이 안그레 광산에서 경력을 계속 쌓은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전형적인 한인 가정은 아무다리야, 시르다리야, 그리고 그 강 언덕에 정착했다. 그러나 농민이 져야 할 짐보다 광부가 져야 할 짐이 더 가볍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여기나 저기나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땀 흘려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이 작품은 주로 굶주림으로 죽지 않기 위해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그 때 우리에게 양질의 주택, 고급스러운 가구 및 의류, 개인용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및 기타 기계들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블라디미르 자신은 1963 년부터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담당했고 동시에 그곳에서 공부도 했다. 군대에서 복무한 후 그는 타슈켄트에서 일했다. 건설 현장의 콘크리트 노동자, 디자인 대학의 화가, 대규모로 발행되는 신문의 특파원이었다. 1975 년에 그는 타슈켄트 주립 대학의 저널리즘 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화가가 되는 꿈을 꾸었고 재능과 그에 대한 열망을 겸비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10 년 동안 그는 안그레 시의 신문에서 특파원, 책임 비서, 부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5 년에 그는 소련 공화국 신문인 한인들의 «레닌 기치»(현재 «고려일보»)에 특별 특파원이 되었다. 1990 년부터 1994 년까지 그는 이 신문의 타슈켄트 국장을 맡았다. 동시에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에서 공식적 활동으로 대중 매체 및 홍보 부서를 이끌었다.
그 시기의 ‘레닌 기치’를 이끌던 그룹은 선발된 다섯 명이 한몸처럼 단합된 한팀으로 이루어졌다. 특별히 엄선된 사람들로 이들이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이 말했듯이, 그것은 «실적»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한인 디아스포라 민족 문화의 보존을 위해 크건 작건 그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 낼 각오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고 신중하게 선택된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설문 조사를 통해 엄선된 후 발탁되었다. 그들 모두는 이전에 러시아어 출판물에서 성공적으로 일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후보자를 선택할 때 교육 및 전문적 자질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디아스포라의 연대기를 자발적으로 작성할 의지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블라디미르 김은 «우즈베키스탄 콤소몰인들»신문에서, 비체슬라브 리는 «보스토크의 개척자»에서, 브루트 김은 «보스토크의 날개»에서 왔다. 포토 저널리스트로 출근하기 전 빅토르 안은 다양한 직업으로 일했었지만 예술적인 갈망이 아주 커서 자신의 평생을 예술 작업에 바쳤다.
1994 년 편집실은 구조 조정을 시작했지만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양파 농장으로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블라디미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사전에 상의 한마디 하지 않고 갑자기 상황을 정리하고 떠나버렸듯이 아버지의 다혈질이 발현된 것인지 «고본질»의 심연으로 뛰어 들고자 하던 비밀 계획이었는지, 미래의 책을 위해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직접 물어봐도 여하튼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한인 농업 용병에 대한 주제는 여전히 그의 예비 자료 창고에서 말라가고 있다.
다시 주요 무대로 돌아온 그는 몇 년 동안 ‘고려신문’에서 일했다. 다양한 사회, 정치 및 문학 잡지, 연감, 책자들을 출판했다. 2012 년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의 도움으로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한인 디아스포라에 관한 책 «희망의 언덕»을 출판했다. 한정판으로 나왔지만, «고려사람» 웹 사이트, «아리랑 1937″연감의 페이지에 전자 형식으로 출판되어 작가에게 진정한 명성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생애의 여러 시기에 만들어 낸 동포에 대한 다양한 역사가 담긴 사진 삽화가 포함된 기자의 노트 시리즈이며, 두 번째 부분은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저자는 박식을 과시하고 자신을 가장 유리한 관점에서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교만, 말장난, 교묘한 문학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때로는 “체면”을 잃을 수 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비난 받을 만한 에피소드들도 묘사하였다. 그는 다른 등장 인물들에 대해서도 빼먹지 않고 골고루 합당한 배분을 하였다. 특별한 애정으로 생존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도 서로 도움의 손길을 나눴던 사람들을 기억하였다. «예술적 완결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사실에서 사실로’라고 그는 후기에 썼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붓을 든 화가처럼 펜을 들고 한 획씩 더 하면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신경 쓰지 않고 작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 투명한 진실을 담고 매력적이며 냉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지,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것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고 이 목표는 확실히 달성되었다.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는 그의 인터뷰 중 하나에서 책을 쓰려는 아이디어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5 년 동안 일을 찾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을 돌아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 왔고, 옷장과 다른 쓰레기 중에서 우연히 골판지 상자를 발견했다. 당시 매우 인기 있는 회사 «Свема»의 먼지로 뒤덮인 이 상자에는 흑백 사진들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1971 년에 나는 중고 «Зоркий-4» 카메라를 샀는데 (당시 나는 발행 부수가 많은 ‘타슈켄트 대학’신문에서 일했다), 거의 25 년 동안 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고 에세이, 스케치 및 보고서를 쓰면서 주요 인물들을 촬영했다. 나는 이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 나를 멈추게 했다. 그는 그 상자를 집으로 가져가 마당 창고에 약 10 년 동안 던져 놓았다. 그리고 나서 사진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던 동포들에 대한 일련의 글(감히 에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바로 «얼굴로 보는 디아스포라»라는 제목이 탄생했고, «고려신문»에 «카라다리아 강은 여전히 흐른다»라는 첫 번째 기사가 게재되었다.
나는 책을 출판하면서 사진에 번호를 붙이고 디지털화 하고, 전자 레이아웃, 편집을 추가 하고 힘들게 번 수입인 한 해의 연금을 투자했다. 그 당시 40 년 동안 함께 살았던 아내 아리나 가계비를 줄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해야 했다. 이것은 상업 이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한 일이었는가? 책에 실린 사진과 자료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0 년 전만해도 공화국 전역의 한인 동포들은 ‘고려 일보’ 특파원을 자신들의 눈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최초의 몇 도시 및 공화당 고려문화센터에서 특파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나는 불행히도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사실들의 역사와 사진을 보존하려는 단 하나의 욕심만으로 일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역사의 기록을 지킬 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Владимир Ли, Геннадий Лю, Владимир Ким, Виктор Ан

Слева направо: Владимир Ли, Геннадий Лю, Владимир Ким, Виктор Ан
–이 책의 속편이 있나?
–나는 이미 서둘러야 할 나이이다. 이것은 첫째로 «미완성»으로 게시하기로 결정했고 둘째로는 그들이 지금 말하는 것처럼 온라인에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최소한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제대로 보려는 사람이다. 내 책에 문학적 요소가 아주 작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들도 말하지만 문화적인 매력은 없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의 역사가에게 이것은 진정한 보물이다. 여전히 나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비평가들도 있겠지만. 셋째로, «말없는»작가나 언론인들이 비상업적 책을 출판하는 것은 맨손으로 하늘에서 별을 따려는 것과 같다. 나의 지인 중 일부는 놀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손가락질을 한다. «이것이 왜 필요한가?»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아이들이며, 또 평생 동안 온 마음으로 자신이 해온 것들이다. 이 밖에 다른 모든 것은 헛된 ‘먼지’이다.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런 맥락에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의 저널리즘 및 글쓰기 활동을 검토하면 스스로를 겸손하게 평가하지만 높은 전문성과 신문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그가 해온 훌륭한 조직에 대한 성과들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번째, 그리고 당분간 2 차 구성 요소는 소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Gorbachev perestroika)로 폭발적으로 수요가 나타난 80 년대 후반기에 정당한 자리를 차지했다. 미하일 세르게 예비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날아온 이 단어는 아마도 «혼란과 흔들림»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 해에 가장 두드러진 단어였을 것이다. 대담한 실험은 사회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테스트를 거쳤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예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소심하게, 그리고 더 단호하게 편집실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90 년대 초반, 카자흐스탄 한인 중 최고의 작가와 언론인을 초청하여 매주 16 페이지 분량의 러시아어로 «고려«가 등장했다. 책자의 출판은 타슈켄트 특파원의 창작욕에 불을 지피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으며 자료 준비에 대한 많은 요구가 생겼다.
그러나 영적인 만족과 함께 그러한 시도가 올바른지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사실 신문이 러시아어로 전환되면서 실제로 우리는 민족적인 문화에서 더 멀어졌다. 막 다른 길에 들어 섰다는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강력했던 소련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거대한 국가가 15 개의 독립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한 번은 한 세기가 넘도록 러시아 국민의 문화와 언어의 영향 하에 있던 소련 전역의 한인 디아스포라 사십 만 명이 작은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토착민족들이 갑자기 자국어로 독점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새로운 주권 국가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는 회상한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한 후, 우리는 갑자기 서로 경쟁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 관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생각 자체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시급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한인들을 위한 공공 기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우리 편집부 안에서 오랫동안 공유되고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블라디미르 나우모비치 김이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 세가 된 그는 시작해서 고귀한 대의를 꼭 이루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신문의 편집실은 군사 본부처럼 되었다. 여기서 가까운 장래와 미래를 위한 전술과 행동 전략이 개발되었고, 미래 공공 조직을 위한 헌장 초안과 프로그램이 작성되었다. 창립 그룹의 구성원들은 엄청난 준비 작업을 수행했으며, 공화당 문화 센터를 만들기 위한 조직위원회가 선출되고 한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회의에서 절정에 달했다.
오늘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세기의 80 년대 후반과 90 년대 초, 타슈켄트에 있는 «고려일보»신문의 사무실은 실제로 남북한의 사절들이 우리 디아스포라 대표들과 다양한 접촉을 구축하기 위해 온 (여전히 정부들과의 관계와는 거리가 먼) 유일한 전초 기지이자 연결 센터였다. 개인 여행 중에도 손님들은 먼저 도시의 사무소를 찾았고 정보, 도덕, 가정, 여행, 교통과 같은 것에 대한 지원 요청은 계속되었다. 기자들이 잘 이해한 시기였다. 고려신문 편집부의 복도는 길고 지친 정치적 «가뭄»끝에 먼 고향에서 온 형제 자매들과 함께 민족적인 것을 되찾은 «고려 사람»의 화해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의 훌륭한 시인 우가이 대국은 황혼기에 그의 삶을 결산하면서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시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통계 기관에서 수년간 일했다. 물론 이 모든 경험은 예술 창의에 대한 태도에도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내 능력과 수준에 비해 40 % 정도의 완성도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너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라.
얼마 전, 우리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와 이렇게 평가의 시간을 가졌고, 그는 겸손하게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하며 아쉬움과 또 다른 시도를 할 의욕을 표현했다. 만족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 끊임없는 시도는 예술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이룬 모든 것을 미래의 토대이자 새롭고 완전한 표현을 위한 또 하나의 단계로 인식한다.
글: 게나지 류
번역: 김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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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сточник: “Корейцы Узбекистана” №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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